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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마이 프린세스 보고 생각난 것

by 리엘란 2011. 1. 31.

이런 풍의 여주가 취향.

2005년 8월 15일.

"저는 여기에서..."

손이 떨린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입술이 달싹거린다. '그냥 종이에 써 있는 말을 읽으면 되'라고 그 사람들은 말했지만, 들고 있는 종이에 적힌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정말 괜찮겠어? 언젠가 후회할지도 몰라.

"조선 왕조와 대한 제국의 종말을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내뱉고 나니, 차라리 속이 시원해졌다.
끊임없이 번쩍거리던 카메라의 플래시도, 기자들의 자판 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 뒤에 선 사람들은 입을 벌린채 당황하고 있겠지. 쌤통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입니다. 모든 국민이 나라의 주인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실명씨는 이 자리에 나온 겁니까?!!"
허이구. 벌써 정신 차린 기자가 있다. 놀라운 기자 정신이네.

"조선 왕실과 대한 제국은 1910년에 이미 끝났고, 1945년에 사망 신고를 했습니다. 저는 이 선언을 통해, 이후 조선 왕조와 황실의 부활 시도는 그저 사기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조선 왕조의 정통 후계자인 제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가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봉사입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팔을 잡아당기고 있다. 아무래도 끌고나가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쩌나, 이거 생방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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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모일.
"........내가 미쳤었나봐요. 제가 왜 그때 그런 소릴 했을까요? 다크 언니."

"무슨 소리야?"

"대한 제국 공식 종결 사건. 내가 취업난이 이렇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절대, 저얼대 그런 소리 안했을텐데."

"그게 무슨 고등학교 1학년땐 대학교가 스카이밖에 없는 줄 알았어요 하는 고등학교 3학년 같은 소리야."

5년, 아니 6년인가. 황실 부활 재단이던가 뭔가 하는 단체에서 대한 제국의 정통 후손을 찾았다. 으쌰으쌰. 후손을 모시고 대한 제국을 부활시키자. 으쌰으쌰.
정작 찾아낸 후손, 그러니까 나는 대한 제국부활선언기자간담회라는 긴 이름의 번데기에서 '때려쳐!!'를 날렸다.
그 댓가인지 지금은 취업을 고민하며 내가 다니는 s대 사학과 과방 의자에서 뒹굴거리는 신세.
 
"니 취업난은 이실명 니가 모든 소녀의 적이라 그래."
갑자기 다크 언니가 말했다. 언니는 내가 다니는 s대 사학과의 조교이며, 갑자기 공주가 되었다 아니게 된 나를 평범하게 대해주는 드문 사람이다.

"무슨 소리에요 그게?"

"왜, 여자애들은 어렸을 때 누군가 짠하고 나타나서 '공주님, 찾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 해주는거 꿈꾸잖아. 근데 정작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니가 그런 짓을 했으니, 너는 모든 소녀들의 적이지."

"그래서 모든 소녀들의 원한이 저에게 모여서 제가 취업을 못하는 거고?"

"그렇지."

"농담치고는 썰렁해요."

"학교에 조선왕조실록 기부해서 들어왔다는 니 농담보단 나아."

"학교에 잔디 깔아줘서 들어왔다던가 건물 세워줘서 들어왔다는 농담은 흔하잖아요! 왜 저만 갖고 그래요?!"

"니 농담은 진담인 것 같거든."

으, 할 말이 없다. 1학년 첫 ot 때, 저 농담을 날린 후 받았던 시선들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아직도 타박을 당하다니.

"한번 물어보기나 하자. 그때 왜 기자회견장에서 그런 소릴 한거야?"

"그거 면접 때 교수님도 여쭤보시던데."

"말 돌리지 말고."

"...잖아요."

"응?"

"우습잖아요. 21세기에 황실 운운하는게. 무슨 시대 착오적인 소리에요. 정신 좀 차리라고 한방 먹인거죠. 근데 지금 취업하려고 보니까 깜깜해요. 그냥 공주 시켜준다고 할 때 공주 할걸."

"그럼 지금이라도 다시 재단 찾아 가서 공주 한다고 할래?"

"슬프게도 5년전의 저한테 비웃음 살 짓은 피하고 싶답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이 문제가 있었어."

"뭐가."

"그때 그 사람들은 나한테 공주님 시켜준다고 했거든요. 근데 내가 남자라면, 왕자 시켜줬을까요, 왕 시켜줬을까요?"

"왕... 이겠지. 아마?"

언니가 '얘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거야?'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바로 그 점이에요! 제가 남자였다면 혼인 여부에 상관없이 왕 시켜줬을거란 말이죠. 근데 제가 여자에 미혼이라는 이유로 기껏 공주밖에 안 시켜줬다고요. 그때 저한테 여왕 시켜준다고 했으면 저 얌전히 시키는데로 했을지도 몰라요?"

언니가 대답이 없다. 저 표정은 '내가 쟤랑 말을 섞다니 참 쓸데없는 짓이었어'인 것 같다.
오늘도 농담이 실패했다.